LONELY GENTLEMAN IN HIS ONLY SUIT 23
고독한 단벌신사 : 제23화 보영 리 아뜰리에
고독한 단벌신사(Lonely Gentleman in His Only Suit)는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소개하는 SSC 연재물로, 원덕현 디렉터가 직접 단벌 착장을 입고 평상시에 좋아하는 공간 혹은 가고 싶었던 공간을 찾아갑니다. 카테고리와 지역, 인물 등 상관없이 골고루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스물 세번째 고독한 단벌신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제
보영 리 아뜰리에
장소
서울 종로구 율곡로 84 가든타워
문의
070-4038-2095
크레딧
출연 원덕현
촬영 홍두리
작가 박진명
프롤로그
주말을 제외한 평일 내내 보영리 아뜰리에를 지나오면서 한번 가봐야지 했던 것이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가지 않았거나 못 갔는데 드디어 이번에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책을 제본하는 이곳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효율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뀌면서 효율성을 비롯해서 신속성, 용이성 등 단점 보다 더 많은 장점들이 생기면서 삶은 풍요로워지고 있죠. 심지어 디지털 문서를 넘어서 이제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닌 듣고 보는 서비스로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흐름이라면 사람들이 무언가를 생산하는 활동 자체가 점진적으로 아주 많이 축소되지 않을까 싶고 많은 전문가들 또한 그렇게 예견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완전하게 버리거나 잊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고대 물품들은 박물관으로 가고 있고, 불과 수 십 년이 지난 무언가도 전자상거래를 통하여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저는 이번 인터뷰와 촬영을 진행하면서 예술 제본 원데이 클래스도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몇 안 되지만 정말 밀도 높게 애정해 주시고 읽어주시는 고독한 애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표현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1권을 제본하여 드리고자 하는데요. 인터뷰를 다 읽으시면 쉽게 풀 수 있는 퀴즈를 푸시는 1분을 추첨하려고 합니다. 그날 하루 스케줄을 모두 할애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긴 시간 동안 저를 포함한 이보영 작가의 도움으로 정성스럽게 예술 제본을 통하여 시집을 만들다 보니 이벤트는 무슨 이벤트. 그냥 하지 않고 책을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장하고 싶어서 나름 기준을 정하였는데요. 응모자가 100명이 되지 않을 시에는 제가 소유하고자 합니다. 사실 고독한 단벌 신사의 좋아요 수가 적어서 가끔 더 이상 하지 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름 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그 수치가 민망하기도 하고 말이죠. 많은 구독과 참여 부탁드리며 저조한 참여일 때 제가 소장하게 되는 점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만든 이 책을 저에게 선물하고 싶네요라고 까진 말하고 싶진 않지만 쓰게 되네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마도 효율성을 떠나 이처럼 정성이 들어간 것을 만들었을 때 생기는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예술 제본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재미있게 인터뷰를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고독한 단벌신사 (이하 고단신) : 먼저,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보영 : 저는 말 그대로 ‘책을 만드는(製本)’ 사람이에요. 하지만 단순히 책을 예쁘게 만들기 위함은 아닙니다. 책의 본연의 기능이 ‘읽는 책’으로써의 가치, 그리고 눈으로 즐기기 위한 ‘보는 책’으로써의 경험을 주기 위해 책을 만들고 있어요. 오랫동안 가치 있게 소장하고 간직할 수 있도록 책을 아름다우면서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고요. 앞서 언급한대로 정확히는 ‘예술제본가’라고 해요. 저는 현재 율곡로에서 유럽 전통, 특히 프랑스의 전통 제본양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단신 : 저는 늘 이곳을 지나다니는데 아뜰리에 로고가 독보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동네는 이미지적으로나 위치적으로 사무 공간으로서의 느낌이 강한데요. 이 곳에 아뜰리에를 오픈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보영 : 지금은 익선동 한옥거리, 안국역 북촌거리처럼 젊은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문화 상권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지만 이곳을 보금자리로 시작하게 된 2011년에는 주변 상권이 다소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예술제본이라는 작업과정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차분하고 조용한 장소를 공방으로 결정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첫 번째 조건은 인적은 많지 않지만 문화와 예술이라는 콘텐츠에 부합하는 장소였죠.

 

그래서 평소 좋아하던 광화문 거리를 기점으로 그 근방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우연치 않게 지금의 공방을 시작하게 되었고요, 그렇게 공방을 운영한지도 올해로 11년째가 되었답니다. 사실 초기에는 입문, 중급, 고급, 심화반 등 단계별 정규 수업만 진행했는데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수요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간단한 문화 체험 제공의 일환으로 원데이 수업을 별도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고단신 : 예술 제본’이 현대 사회에서, 특히 국내에서 많이 생소한데요. 예술 제본에 대한 설명 부탁드려요.

 

이보영 : 제본가라는 용어는 본래 리가토르(엮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제본이라는 행위의 시작은 14세기에 들어서야 ‘제본가(Relieur)라는 프랑스 용어가 도입되었고요.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필사본을 엮는 일을 시작으로 발전해온 역사가 있는 작업이에요. 오늘 날 예술제본가는 애서가나 출판인, 예술가, 문인들을 위한 귀중한 한정본이나 초판본, 포트폴리오, 방명록, 그림 등을 한 권의 ‘책’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합니다. 또한 책의 내용과 책을 보는 사람의 성향 등을 면밀히 파악해 책을 재구성하는 것은 물론, 보수·복원의 보존적 기능과 함께 심미적 가치를 더한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예술 제본가의 몫이죠.

 

 

 

 

 

고단신 :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거나 책을 좋아해서 이 길을 택했을 것 같아요. 어느 쪽이었나요?

 

이보영 : 저는 원래 순수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에 문득 프랑스언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조금씩 공부를 하게 되면서 프랑스 유학에 대한 목표가 생겼고 2005년, 프랑스로 어학 연수길에 오르게 됐답니다. 그렇게 시작한 유학생활은 언어를 습득하는 일만큼이나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예술과 언어를 결합해 어떤 일을 하면 어떨까라는 고민의 시작이 예술 제본이라는 프랑스 전통 문화를 체험하게 되는 기회를 만들게 되었고, 예술제본의 고색창연한 문화와 분위기, 전통방식으로 수틀에 책을 꿰매고 있는 이국적인 모습들에 매료됐습니다. 마침 오랜 시간 책을 만드는 일을 해 오셨던 홈스테이 할머니 할아버지 틈에서 예술제본을 체험하고 실습을 통해 책을 꿰매고 단장하는 일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프랑스 제본가들의 작품들을 직접 접하게 되면서 제본가의 삶을 동경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스승님의 추천으로 국립제본학교에 입학하고 기능인증 자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귀국해서 예술 제본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고단신 : 이 일은 하고자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흘러오게 된거군요?

 

이보영 : 그렇죠. 저는 사실 현지에서 예술제본을 처음 접했을 때는 외국의 전통문화가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재미있고 친숙하게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고, 더군다나 이 예술제본을 직업으로써 확장하는 일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프랑스에서 입학을 추천해 주셨던 담당 교수님으로 인해 또 하나의 기회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파리에 국립 제본 관련 커리큘럼을 운영하는 2곳의 학교가 있었는데 입학까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일단 한국으로 들어와 있었어요. 왜냐하면 다시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3~4년은 프랑스에서 더 공부를 해야했으니까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제 나이 20대 후반에 들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제본공부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음의 부담도 되었습니다. 그 때 프랑스 제본학교를 추천해 주셨던 교수님으로 인해 8개월의 장고 끝에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단신 : CAP(예술제본 교원자격증) 취득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은 현지인들보다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프랑스 학교에서는 국내에서 이수한 학점을 인정해주진 않았나요?

 

이보영 : CAP자격증 시험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커리큘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반시험에 필요한 학습과정과 제본학교2년간의 실기 및 이론 학습과정을 모두 거친 후, CAP자격증 시험에 응시하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고단신 : 아쉬운 부분이네요. 그렇다면 당시 학교 다닐 때 한국인들은 없었나요?

 

이보영 : 제 기억으로는 한국인들은 전무했습니다. 대체로 일본 학생들이 많았죠. 제본이라는 단어가 일본어인 본(本, 책)에 유래한 것만 보더라도 일본 학생들의 수요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사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8개월동안 국내 예술제본 시장 조사를 해 본 적이 있었어요.

 

200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에 예술제본을 가르치는 공방이 홍대에 딱 한군데가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수소문을 통해 해당 공방의 예술제본가 선생님을 만나보니 그 분 또한 프랑스 유학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해 우리 나라 최초로 예술제본 공방을 운영하셨던 분이더군요.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예술제본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조언도 얻을 수 있었구요, 공방을 운영하는데 많은 모티프를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예술제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나 문화 소비 장르로 가치가 미비했던 시기였는데, 그렇게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예술제본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고단신 : 프랑스에서 커리어를 만들어 이어갈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이보영 : 먼 타지에서 홀홀단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예술제본 자체가 생소한 분야라 처음 접하는 저는 현지인들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도 언어의 한계로 인해 쉽지 않았고요. 무엇보다 가족과의 연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귀국은 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1인 공방의 초기는 고민과 후회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마음 속으로 생각한 공방운영의 최대 마지노선은 정확히 3년이었습니다. 3년 이후 성과가 없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살 길을 찾겠다구요.

 

그런데 3년이 되는 시점부터 공방에 실질적인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 등 SNS매체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예술문화에 대한 소비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예술제본의 인식 또한 많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죠. 그러면서 여러 예술제본 및 도서 복원 등 기관이나 단체로부터 의뢰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공방도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체에서 다루기 좋은 생소한 소재다 보니 TV나 인터뷰를 자주하면서 관심도가 높아지더라고요. 그 이후에 11년이 지나 지금의 공방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고단신 : 아무래도 종이는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동양에도 그런 제본 기술들이 발달했을텐데, 그중 우리나라의 전통 제본 방식과 유럽 프랑스의 제본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이보영 : 초기에는 동서양 모두 두루마리 형식으로 시작했어요. 한지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제본 방식과 프랑스(유럽)의 예술제본 방식은 실이나 끈을 이용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과정과 절차, 재료, 도구, 가공/마감의 형태가 비슷해요. 다만 낱장의 종이를 접지하고 실이나 끈을 묶는 우리나라 전통 제본 방식은 프랑스 전통 예술 제본 방식에 비해 오히려 좀 더 간결하고 효율적이죠. 프랑스 전통 예술제본은 그 과정과 쓰이는 재료와 도구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들이 많습니다. 다소 비효율적이고 시간과 노력이 더 들어가는 셈이죠. 그래서 유럽에서는 제본하는 과정을 건축에 비유하기도 해요. 집을 짓 듯이 기초 공사가 되게 중요해서 초기 단계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공정이 많아요. 그러나 이 단계는 수많은 선조들의 지혜와 견고함, 아름다움이 담긴 과정이에요.

 

 

 

 

고단신 : 지금까지의 작업물 중에 가장 애착이 가거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보영 : 10년 전 프랑스에서 열린 전시에 참가했던 작품인데요. 라 퐁텐 우화집’을 종이라는 물성에다가 IT를 접목해보자는 마음에 표지에 태블릿을 붙여 책에 있는 내용들을 소리로 녹음해 넣어둔 작품이에요. 작년에 작업한 작품 중에는 콜레트’라는 프랑스의 여류 작가의 책이 있는데요. 직접 염색을 하고 가죽을 변형해서 만든 책이에요.

 

고단신 : 작업물을 살펴보니 금박과 재봉도 해야해서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네요.

 

이보영 : 사실 유럽에는 제본하는 일을 크게 세 가지로 분리를 해서 복원가, 제본가, 금박가가 있어요. 공방도 따로 운영하며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분업을 하는 거죠. 국내는 유럽만큼 제본하는 일이 분업화되어 있지 않아서 공방에서 제작한 책표지에 수제로 금박장식까지 하죠. 하지만 기계프레스 금박작업시에는 외부업체에 따로 의뢰하기도 합니다.

 

고단신 : 가장 좋아하는 종이는 무엇인가요?

 

이보영 : 가장 어려운 질문인데요. 책 한권을 만들 때 다양한 종이들을 활용합니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종이들은 하나같이 그들 만의 특색이 있습니다. 그 중 제본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 중, 미술표현의 기법 중 하나인 마블링으로 패턴을 적용한 마블지(Marbling paper)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 공방에 제가 직접 만든 마블지도 있는데, 간혹 프랑스의 마블지 제작가를 통해 구매하기도 합니다. 마블지 제작가 역시 전문성을 갖춘 아티스트가 따로 존재합니다.

 

그렇게 구매해온 다양한 마블지를 활용하여 작업 시 적용하거나 소장하기도 합니다. 이 종이가 흥미로운 것은 마블지에는 그 패턴과 색감에 따라 역사가 보입니다. 마블지의 시초는 터키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만, 마블지에 적용된 패턴형태와 색상 구성을 알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마블지인지 알 수 있어요. 마블지의 시작은 해충이나 기름 등 책을 훼손하는 요소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적용한 것이었는데, 아트적인 요소 또한 발전해 왔습니다.

 

 

 

 

 

고단신 : 작업을 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보영 : 제가 생각하는 예술 제본은 단순히 책을 보다 아름답게, 예쁘게 작업하는 과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예요. 저는 사람들이 책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의 첫 이미지가 그 책이 담고 있는 의미와 내용을 충분히 투영하고 대변할 수 있어야 좋은 예술 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책의 내용과 의뢰자의 성향을 파악을 최우선으로 해요.

 

책의 저자와 내용을 파악하는 과정은 제본의 컨셉을 구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거든요. 저자의 이력은 저자의 인생을 그려보는데 도움이 되고, 책의 내용은 그의 가치관과 생각, 의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죠. 그리고 의뢰자가 무슨 색깔이 좋아하는지, 어떤 종류의 패턴을 선호하는지, 어떤 느낌의 재질을 좋아하는지, 때론 반대로 의뢰자에게 어울리는 색깔, 패턴 등을 검토해 본 후에 콘셉트를 정하고 작업을 시작해요.

 

고단신 : 홈페이지를 살펴보다 책의 아름다움은 제본가의 숙련도에 달려있다. 그러나 제본 자체는 진정한 보물이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어요. 여기서 말하는 제본가의 숙련도는 무엇이며,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기반돼야 할까요?

 

이보영 : 예술제본은 대량 생산방식이 아닌 오랜 시간과 압력을 필요로 하는 수공의 작업 과정이에요. 이 모든 과정은 0.1mm까지 계산해야 하는 정밀함을 요구하는데, 오직 손과 도구만을 이용해 섬세하고 정밀하게 표현하고 조율하는 것이죠. 이런 과정에서 요구되는 작업자의 숙련도는 그럴싸한 비책이나 노하우가 있는 것은 아니예요. 오직 시간과 인내에 비례할 뿐이죠. 즉, 오랜 훈련과 탐구가 작업자의 숙련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단신 : 한국에서 예술 제본가로서 활동하는 데 제약도 많을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이보영 : 요즘 북 바인딩이라는 단어로 원데이 수업이나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예술 제본은 여러 가지로 깊이 있게 많이 달라서 장벽이 많아요. 아무래도 생소하고 입문하는 과정에 난관이 있다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예술제본을 가르치고 소개하는 공방들이 소수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예술제본에 입문하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사료 혹은 참고자료가 드물어 이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실습위주로 운영되는 분위기예요. 물론 예술제본 관련 일부 서적이 판매·유통되고는 있지만, 예술 제본의 역사나 철학적 의미, 발전배경과 세부 작업 공정 등 심도 있는 이해도를 요구하는 서적들이 대부분이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쉽게 접근하기 힘들죠. 그런 것들이 예술제본의 수요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소비자의 니즈와 예술제본 간의 간극을 좁히고 최초 진입장벽을 낮추는 일이 예술 제본가에게 놓인 숙제이자 가장 어려운 점인 것 같아요.

 

고단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가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보영 : 기술과 문명의 발달은 인쇄와 제본의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사람의 손과 도구로 다듬고 빚어진 책에는 그 기술과 편리함을 뛰어넘는 섬세함과 따뜻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섬세함과 따뜻함이 담긴 예술제본의 작업과정을 좋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 널리 전파하고 싶어요.

 

 

 

 

고단신 : 보영 리 아뜰리에에서는 원데이 클래스 이외에도 정규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죠. 예술 제본에 대한 관심도는 어떠한가요?

 

이보영 : 여기 오시는 분들의 공통점은 책을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분들이죠. 최근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예술제본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취미 활동의 일환으로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요, 클래스 문의와 수강자분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드린대로 예술제본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제약을 좀 더 해소한다면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단순히 예술 제본을 취미활동이 아닌, 그 이상의 가치를 경험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고단신 : 이야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궁금한 부분이 생겼는데요. 혹시 그렇다면, 만화책을 제본한 분도 있었나요?

 

이보영 : 네, 있었어요. 직업이 소방관이셨는데 좋아하는 만화책 10권의 시리즈를 가죽으로 제본했습니다. 소장용으로 의뢰했어요. 직접 읽는 책은 10권 더 있다고 했던거 같아요(웃음).

 

고단신 : 예술 제본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이보영 : 제본이 단순히 기능적으로 보수가 필요해서, 혹은 책을 읽기 위해서 이뤄지는 과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주어진 제약 조건 속에서 책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과 목적을 온전히 보존하고 살리면서 새롭고 다양한 미적 해법을 탐구하는 과정이죠. 그런 의미에서 예술 제본이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갖길 바랍니다. 예술제본가의 기술과 예술적 안목이 더해져 읽는 책으로의 본질적인 가치와 보는 책’으로의 심미적 즐거움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단신 : 예술 제본이 책을 보존하고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제 현재 관점에서 봤을 때 오브제나 소품으로의 의미를 갖게 됐다고 이야기군요.

 

이보영 : 제본은 읽는 책의 기능만이 아닌 책을 소장하고 감상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기도 해요. 제본가의 기술과 예술이 빚어낸 오브제(objet)로써의 책은 말 그대로 예술품이 되는 것이죠. 유럽 등 해외에서는 오늘날 명망 있는 제본가의 작품들이 경매를 통해 소개되거나 소장되고 있습니다. 사실상 예술제본 이라는 표현은 20세기에 생긴것으로 사양 산업이 되어가던 시대에 누군가의 디자인이 주목을 받으면서 하나의 작품이 되기 시작한거죠. 실제로 매년 고서전이나 전시회를 통해 작품들이 대중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 판매되고 있습니다.

 

고단신 : 누군가가 했던 것들을 답습하지 않았을때 비로소 새로운 장르가 생기고 열린 거네요.

 

이보영 : 그렇죠. 책의 가치가 명망있는 장인으로 구별이 되다보니 예술 제본이라는 개념이 부활하면서 장인들의 기법이 후대에 전달되고 교육이 되면서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잡게 된거죠. 

 

 

 

 

고단신 : 앞으로 예술제본가로서 계획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려주세요.

 

이보영 : 현재는 예술 제본가로서 좋은 책을 만들고 복원하면서 해외 작품 출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예술제본가들의 실력을 본고장인 프랑스에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실력 있는 예술제본가들을 양성하고 그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협회, 플랫폼을 만드는 것도 추진하려고 계획 중이고요.

 

고단신 :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요?

 

이보영 : 저는 이 직업을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와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취미 그리고 직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지금보다 일과 개인생활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예술제본 공정 자체가 날카롭고 둔탁한 도구들을 사용해야 하는 작업이라 위험하기도 하고 체력소모가 많기 때문에 이 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할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에필로그
처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원 데이 클래스의 소중한 경험을 하다 보니 오프더레코드 대화의 시간이 여느 때보다도 많았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하다 보니 금세 친해진 듯한 느낌도 들었고 삶의 방향성이 일치한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방향성이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다 보니 서로 공감대 형성이 보다 쉽지 않았나 싶은데요. 척박한 사회생활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한 누나 혹은 친구 같은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적당히 살아 보니 삶의 방향성이 같은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아마 자신의 방향과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느냐가 삶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또 한 가지의 척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이 콘텐츠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은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이라 감히 예상하고 싶습니다. 모두 올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쉽게도 코로나바이러스 시대는 2021년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를 동반하여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한 시도조차 현재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를 봤을 때 코로나바이러스는 작은 문제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분명히 잘 이겨낼 것입니다.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독한 단벌신사는 콘텐츠 촬영을 빌미로 음식 혹은 제품의 무료 제공을 원하거나 금전적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느낀 점을 좀 더 자유롭게 쓰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저희는 홍보 파급력이 기대 이하이거나 없습니다. 귀찮게 찾아가서 요청하였으나 좋게 생각해주시고 승낙해주신 모든 업체분들께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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